고려시대에도 ‘감찰관’이 있었을까? – 어사제도의 시작
조선의 암행어사는 드라마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며, ‘백성을 위한 비밀 감찰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어사의 제도적 기원은 **조선이 아닌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는 성종 이후부터 **중앙 권력이 지방을 견제하기 위한 공식 감찰 기구**를 운영했고, 이들이 바로 **‘어사(御史)’ 또는 ‘체찰사(體察使)’**라 불린 존재였다. 이 글은 **고려의 어사제도는 어떤 모습이었고, 조선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를 구조와 사례 중심으로 분석한다.
1. 고려의 어사제도, 언제 시작되었나?
고려에서 중앙 감찰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기는 **성종(재위 981~997)** 때다. 성종은 **유교적 중앙집권 체제 확립을 위해 지방관 감찰 시스템을 강화**했고, 이때 설치된 기구가 바로 ‘사정부(司正府)’와 ‘어사대(御史臺)’였다.
📌 어사대의 성격
- 설립 시기: 성종 5년(986년)
- 기능: 중앙 관료와 지방관의 비리 감찰, 탄핵
- 지위: 중서문하성, 중추원과 대등한 독립 기구
- 구성: 대간(大諫)이라 불리는 간관들이 활동
즉, 고려의 어사는 단순한 순시관이 아니라, **왕권을 대리해 관료를 조사·처벌할 수 있는 ‘감찰·탄핵 전담 기구’**였던 것이다.
2. 어사제도의 조직과 구조
| 기구명 | 기능 | 주요 직책 | 비고 |
|---|---|---|---|
| 어사대 (御史臺) | 관료 감찰, 탄핵, 정치 견제 | 대사간, 간관 | 중앙 감찰 전담 |
| 사정부 (司正府) | 지방관 행정 조사 | 사정관 | 지역 방문 조사 역할 |
| 체찰사 (體察使) | 군사 및 지방행정 점검 | 임시 파견 관료 | 전시 또는 특별사건 시 파견 |
어사대는 **상시 운영 조직**이었고, 사정부와 체찰사는 필요 시 가동되는 **보조 감찰 조직**이었다.
3. 조선의 암행어사와의 차이점
- 파견 범위: 고려는 수도 감찰 비중이 높았고, 조선은 지방 순찰 중심
- 감찰 권한: 고려 어사는 **중앙 최고위 관료까지 탄핵 가능**, 조선 암행어사는 지방관 위주
- 보고 체계: 고려 어사는 **중서문하성과 병렬 조직**으로 왕에게 직보, 조선은 **비밀 보고서 형태로 왕에게만 보고**
- 임명 방식: 고려는 정식 관직, 조선은 임시 파견직
즉, **고려의 어사는 권력 내부를 감시하는 정규 제도**였고, 조선의 암행어사는 **지방의 폐단을 통제하기 위한 특수 임무자**였다.
4. 실제 어사 감찰 사례들
- 현종 3년 (1012) – 어사대가 중추원의 고위 문신 A를 **‘향연 수뢰 혐의’**로 탄핵, 파직
- 문종 18년 (1064) – 사정관이 개성부윤의 **부역 착취**를 조사해 해임시킴
- 숙종 6년 (1111) – 체찰사가 황해도 지역의 **세금 도적 사건 미처리** 건을 감찰, 도관 전체 문책
이러한 사례들은 어사제도가 단순 상징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 권한을 가진 **‘조사-보고-처벌’ 3단계 구조**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결론: 어사의 시작은 고려였다 – 감시의 정치적 유산
우리는 흔히 조선의 암행어사를 생각하며 ‘왕권 강화의 상징’이라 여기지만, 사실 그 기원은 **고려의 유교 통치 구조에서 만들어진 정규 행정 장치**였다. 고려의 어사는 행정 감찰뿐만 아니라, 정치적 견제, 권력 내부의 자정 시스템으로도 작동했다. 이 제도는 후에 조선으로 이어지며 ‘비밀 감찰’로 성격이 바뀌었지만, 그 본질은 같았다. **권력은 항상 감시를 필요로 했고**, 그 감시가 제도화되었을 때만이 **왕조는 그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