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의 교육기관은 총독부의 철저한 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점은, 공립학교보다 오히려 **사립학교에 대한 검열이 더 엄격하고 치밀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사립학교는 민간인, 특히 독립운동계 인사들이 세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총독부가 집행한 **사립학교 교육 검열의 시스템과 실제 검열 사례**를 정리해 조선 지식인 사회가 겪었던 **교육적 억압의 메커니즘**을 낱낱이 보여준다.
1. 왜 사립학교가 더 위험하다고 판단됐나?
총독부는 사립학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위험 요소를 인식하고 있었다:
- 자체 교재 제작 – 정부 발행이 아닌 ‘자체 국어·역사 교재’ 사용
- 독립운동가 출신 설립자 – 민족주의 성향의 교장·이사 다수
- 강의 중 비공식 항일 발언 – 역사·윤리 수업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
특히 평양, 진주, 전주 등 지역의 기독교계 또는 유교 기반 사립학교는 **‘문화통치’ 시기 이후 오히려 검열 대상 1순위로 분류**되었다.
2. 총독부의 교육 검열 조직
1923년부터 조선총독부는 사립학교 전담 감시 조직으로 “사립학교 감찰과(私立學校監察課)”를 설치했다. 이 조직은 각 도청과 경찰서 교육계와 연계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 부서명 | 역할 | 검열 방식 |
|---|---|---|
| 사립학교감찰과 | 정책 수립 및 명령 하달 | 정기 보고서 접수, 문제 학교 명단 작성 |
| 도청 교육계 | 현장 지도·관리 | 월 1회 이상 학교 방문, 수업 참관 |
| 경찰서 교육계 | 비밀 정보 수집 | 학생 진술 확보, 교사 외부 발언 모니터링 |
3. 검열 항목과 통제 방식
총독부는 다음과 같은 항목을 중심으로 교육 내용을 검열했다:
- 역사 교육 내용 – 단군, 고구려, 임진왜란 관련 서술 금지
- 국어(한글) 교육 – 순수 한글 문장 사용 제한, 일본어 병행 의무화
- 윤리·도덕 과목 – 충효 강조, 천황 숭배 포함 여부 점검
- 교사 발언 – 일제 비판, 조선 문화 찬양 등 기록화
- 교재 내용 – 비인가 출판물 사용 여부 확인
이러한 기준을 위반한 학교는 **정학, 폐쇄, 이사장 고발 등의 조치**를 받았다.
4. 실제 검열 사례들
- 진주 O여학교 (1931) – 국어 교사 수업 중 “우리 글을 지켜야 한다”는 발언이 문제되어 교사 파면, 학교 2주간 휴교
- 전주 모 사립중학교 (1936) – 자체 제작한 ‘조선사’ 교재 사용 적발, 교장 정직 처분
- 평양 B상업학교 (1940) – 졸업식에서 학생이 ‘애국가’를 부른 정황 보고돼, 이후 감찰 상시 배치
5. 사립학교 교사들의 대응 전략
검열이 심해지자 사립학교 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은밀히 민족 교육을 지속**했다:
- ‘암기’ 위주 수업 – 한글·역사를 말로만 가르치고 필기 금지
- 수업 외 시간 활용 – 쉬는 시간이나 자습 시간 중 소그룹 교육
- 이중 교재 시스템 – 검열용 교재 외에 실제 수업용 ‘암흑 교재’ 별도 제작
- 교사 간 비밀연결망 – 주요 교육 내용을 타 학교에 전파
이러한 방식은 총독부가 파악하지 못한 **‘지하 교육 네트워크’**로 발전하게 된다.
결론: 조선의 사립학교는 민족의식의 최후 보루였다
일제는 공립학교를 통해 조선 청년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고자 했지만, 사립학교만큼은 그 계획이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많은 민간 학교들은 검열과 압박 속에서도 **몰래 국어와 역사를 가르치며 정체성을 지켰고**, 그 교사와 학생들은 이후 **광복과 교육 자립의 주역**이 되었다. 이 글은 ‘교육 검열’이라는 틀 속에서, **어떻게 사립학교가 지식의 저항 거점이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명하는 중요한 역사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