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귀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첫 일자리 실태

 


1945년 광복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미국, 일본 등지에서 귀국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환영과 보상’이 아니라, **일자리 부족과 생계 불안, 정치적 배제**였다. 이 글은 **귀국 독립운동가들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갔는지**, 그리고 해방 직후 대한민국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구체적인 직업 사례와 통계**로 분석한다.

1. 귀국 독립운동가들의 숫자와 배경

1945년~1946년 사이, 임시정부 및 해외 항일 단체 출신 독립운동가 약 3,800명이 귀국했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임시정부, 광복군, 민족혁명당), 러시아 계열 항일 세력, 미국 교민 사회에서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대한민국은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았고, 미군정은 이들에 대해 **체계적인 환영 절차나 직업 연계를 준비하지 않았다.**

2. 귀국 후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직업 현황

직업 유형 종사 인원(추정) 세부 내용 비고
공무원/행정직 약 750명 임시 경찰국, 도청, 군정청 하급직 대부분 비정규직 또는 계약직
교사/강사 약 380명 국민학교, 중등학교 교사, 강습소 운영 임시 교원 자격으로 채용
정당 활동 약 270명 건국준비위, 한국독립당, 사회당 등 무보수 활동 많음
상업/자영업 약 500명 서점, 인쇄소, 잡화상, 포장마차 운영 자금 부족으로 폐업 많음
무직 또는 실직 약 1,200명 정착 지원 실패, 생계 불안 서울·부산 노숙 사례 다수

3. 직업 연결 실패의 원인

귀국 독립운동가들이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행정 인프라 미비 – 미군정은 독립운동가에 대한 고용 정책을 갖고 있지 않았음
  • 학력 및 기술 부족 – 군사·운동 경력 외에 교육이력 없는 경우 다수
  • 기득권 세력의 배척 – 친일 세력 또는 구 조선총독부 출신 관료들이 재집권하며 배제
  • 내부 분열 – 임시정부 세력 간 정파 갈등으로 공조 실패

결국,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귀국 이후 **생계형 노동자 또는 무직 상태**로 방치되었다.

4. 대표적 사례

  • 김구 선생 측근 A씨 – 광복군 소속 중령, 귀국 후 2년간 실직, 이후 인천의 한 국밥집 운영
  • 임시정부 문관 B씨 – 경력 없음으로 교사직 불가, 종로 인쇄소 취직, 1년 후 폐업
  • 독립운동가 C씨 – 연해주 항일 활동 경력자, 귀국 후 판자촌 거주, 1950년대에야 독립유공자 신청

5. 보훈제도의 도입은 언제?

정부 수립 후인 1962년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보훈은 1970년대 후반까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그 전에 사망한 독립운동가는 **유공자 인정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경우가 수두룩했다.**

결론: 광복은 독립운동가에게 ‘종착점’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광복을 독립운동가의 ‘영광의 순간’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해방 직후 정부가 없고, 행정도 마비된 가운데, 정작 나라를 위해 싸운 이들은 **기득권에 밀려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 글은 단순한 역사적 감상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독립운동의 공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잊었는지를 묻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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