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의 한반도는 혼란 그 자체였다. 일제가 물러간 공백 속에서 정치 권력을 둘러싼 충돌이 거세졌고, 좌우 대립, 지역 갈등, 친일파 청산 문제 등이 얽히며 정국은 급속도로 불안정해졌다. 그 가운데 **공식적으로는 '의문사' 혹은 '단순 사고'로 처리되었지만**, 사실상 ‘암살’로 강하게 의심되는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이 글에서는 1945~1950년 사이, 해방 공간에서 비공식적으로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정치인들의 사례를 추적하며, 현대사에서 지워진 권력의 뒷면을 파헤친다.
1. 암살이 난무한 해방 공간의 배경
1945년 광복 이후, 미군정이 남한을 통치하게 되면서 **이념·계급·지방·친일 청산 등 수많은 갈등이 얽힌 권력 진공 상태**가 만들어졌다. 좌익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추진했고, 우익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준비했다. 이런 격동 속에서 **정치적 반대자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이 암묵적으로 용인**되기 시작했고, 실제로 다수의 정치 활동가, 지식인, 언론인들이 의문사하거나 실종되었다.
2. 대표 사례: 여운형(呂運亨)의 암살
1947년 7월 19일, 좌우 합작을 추진하던 여운형은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는 당시 중도 좌파 진영의 대표 인물이었으며, 남북 협상과 통일 정부 수립에 적극적이었다. 범인은 **백의사 출신 한지근**으로 밝혀졌으나, 배후 세력에 대해서는 제대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미군정과 우익 정치세력의 묵인 또는 방조 가능성이 거론되었고, 여운형 암살은 **남한 정치의 중도 세력을 붕괴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3. 몽양 여운형 외 다른 의문의 죽음들
- 이승만에 반대한 임정계 인사들 – 주요 독립운동가 중 일부는 해방 후 미스터리하게 정치권에서 사라짐
- 조선공산당 남로당계 인사들 – 남한 내 활동 중 실종되거나 구금 도중 사망한 사례 다수
- 좌우 합작 지지 지식인들 – 언론사 논설위원, 대학 교수 등이 길거리에서 칼에 찔리거나 피습
이들의 죽음은 대부분 **경찰 수사 미진, 정치적 의도 불인정, 자료 부실** 등의 이유로 묻혀버렸고, 오늘날까지도 공식적으로는 '우연', '미제 사건'으로 분류되어 있다.
4. 해방 공간 주요 암살 의심 사건 정리
이름 | 직위/성향 | 사건 일시 | 사망 원인 | 암살 의혹 |
---|---|---|---|---|
여운형 | 좌우합작 중도파 지도자 | 1947.07.19 | 총격 사망 | 백의사 배후설, 미군정 묵인설 |
장덕수 | 우익 우파 정치인 | 1947.12.02 | 자택 피습 사망 | 남로당 보복설 |
김원봉 측근들 | 좌익 계열 독립운동가 | 1946~1949 | 실종 또는 감금 중 사망 | 정치보복설 |
이관술 | 좌파 정치인 | 1949년 | 의문사 | 고문치사 가능성 제기 |
5. 암살 이후 남겨진 정치 지형의 변화
여운형이 암살되자 중도 좌파 세력은 급격히 와해되었고, 좌익은 북으로, 우익은 남으로 정치적 중심축이 기울기 시작했다. 동시에 ‘물리적 제거’라는 방식이 **비공식적 정치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 흐름은 이후 6.25 전쟁과 군사 정권 시기까지 이어졌다. 해방 공간에서 벌어진 암살과 정치적 제거는 단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어려웠던 토양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결론: 암살당한 사람들, 지워진 역사 속 목소리
공식적인 교과서나 언론에서는 해방 직후의 암살 사건들이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대한민국의 정치 질서 형성과 깊이 얽혀 있으며, 그 과정에서 **잊혀진 인물들**, **억울하게 죽은 이들**, 그리고 **말하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 글은 그 지워진 목소리를 되짚으며,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가 **어떤 어두운 현실을 통과해 왔는지**를 다시 묻는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