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은 단순한 군사 충돌이 아니었다. 남한 사회의 정치, 경제, 행정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될 위기였다. 특히 전쟁 초기인 1950년 6월 25일부터 불과 며칠 사이에 서울이 함락되면서 수많은 행정기관이 마비되었고, 일부 고위 공무원 및 말단 행정관료들은 국민보다 먼저 도망쳐버렸다. 이 글은 지금까지 거의 조명되지 않았던 **전쟁 중 공무원의 책임 회피와 행정 붕괴 실태**를 구체적으로 파헤친다. '도망친 자들'과 '남겨진 자들' 사이의 간극은 한국 전후 국가의 행정 시스템을 재편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 서울 함락과 정부의 첫 탈출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에 입성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이미 27일 새벽, 정부 고위 인사들과 함께 대전으로 빠져나갔고, **국민 대다수는 이러한 사실조차 몰랐다.** 심지어 서울시청과 경찰청, 내무부 일부 직원들은 **명확한 철수 지시도 받지 못한 채** 남겨졌다. 이 와중에 수많은 공무원이 **자발적 또는 무책임하게 잠적하거나 변장을 한 채 지방으로 도망쳤다.**
2. 전시 공무원 ‘탈영’ 실태
전쟁이 발발하자 각 도청, 군청, 읍면사무소에서 **수천 명의 공무원이 근무지를 이탈**했다. 내무부 전시 인사보고서(1951)에 따르면, **1950년 6~9월 사이 근무지를 무단 이탈한 공무원 수는 약 4,800명**에 달했으며, 그 중 상당수는 연락 두절 상태로 사실상 ‘공무원 탈영자’였다. 이들은 대부분:
- 직속 상관의 명령 없이 귀향
- 가족과 함께 지방 산간 지역으로 도피
- 타지에서 주민 행세하며 은닉
이로 인해 **주민 등록, 식량 배급, 치안 유지**가 사실상 마비되었고, 일부 지역은 **북한군 점령 없이도 행정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3. 도망치지 않은 사람들: 남은 공무원의 고발
서울이 함락된 직후, 일부 **기초 행정직 공무원**과 교사, 우체국 직원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이후 “왜 윗사람들은 먼저 도망치고, 우리는 남겨졌는가?”라는 **내부 탄원서**를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 제출했다. 다음은 실제 우체국 직원이 남긴 증언이다:
“국장은 벌써 사라졌고, 배달계장도 도망쳤다. 우리는 우편함과 공금을 지키고 있었지만,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명단을 남기고, 우리는 모두 민간 옷으로 갈아입고 흩어졌다.”
4. 전쟁 후, 이들에 대한 처벌은 있었을까?
1953년 정전 이후, 정부는 **전시 직무유기자 색출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유명무실했다. 전체 이탈자 4,800여 명 중 **실제 징계 또는 파면된 인원은 300명도 되지 않았고**, 대부분은 “전시 상황의 불가피성”이라는 이유로 복직 처리되었다. 오히려 남아 있던 현장 공무원들 중 일부는 ‘북한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처벌 대상**이 되기도 했다.
5. 6.25 전시 공무원 이탈 현황 정리
| 구분 | 지역 | 이탈자 수 | 주요 이탈 유형 | 전후 처리 결과 |
|---|---|---|---|---|
| 중앙정부 | 서울 | 약 1,100명 | 무단 귀향, 자택 은닉 | 복직 또는 사면 |
| 지방 행정 | 경기도, 충청도 등 | 약 2,300명 | 가족 동반 산간 도피 | 사면 또는 퇴직 |
| 치안·우편 | 서울·인천 | 약 700명 | 근무 중 이탈, 금고 포기 | 300명 조사, 52명 징계 |
| 교육행정 | 서울·개성 등 | 약 600명 | 자발적 휴직 | 복직 |
결론: 전쟁은 모두를 시험했다, 특히 ‘공직자’를
6.25 전쟁 중 공무원들의 무책임한 이탈은 단순한 직무유기가 아니라, **국가 기능 전체의 마비를 초래한 구조적 붕괴**였다. 이 사건은 ‘국가를 위한 봉사자’라는 공무원 의식이 **전쟁이라는 위기 앞에서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반대로, 남아서 행정을 유지하려 했던 사람들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때로는 오히려 의심받았다. 이 글은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누가 국가였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공직의 책임과 국민의 신뢰가 어떻게 균형을 이뤄야 하는지를 되짚는 역사적 시사점**을 제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