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된 시기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도시 외곽 빈민촌, 달동네, 철거민 정착지에 살던 수만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초등학교에 가지 못했고, **주민등록에도 ‘학생’이 아닌 ‘무직’으로 기재되었다.** 이 글은 당시 **빈곤과 교육의 단절**, 그리고 이를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야학(夜學)’의 교육 실천**을 복원하는 글이다.
1. 빈민 아동은 왜 학교에 가지 못했는가?
국가는 초등 의무교육을 확대하고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빈민촌 아동 상당수는 **교육 사각지대에 놓였다**:
- 주소 미등록 – 무허가 판잣집에 거주, 학교 배정 제외
- 입학 서류 부족 – 출생신고 누락, 호적 없음
- 가사 노동 – 쓰레기 수집, 물지게, 동생 돌보기 등 생계 기여
- 차별과 낙인 – ‘철거민 자녀’라는 이유로 교사·학생의 차별
결국 이 아이들은 **공식 교육 체계에서 자연스럽게 탈락**했고, 그들의 교육권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았다.**
2. 야학이란 무엇이었나?
‘야학(夜學)’은 밤에 열리는 비공식 학교로, 본래는 성인문해교육을 목적으로 했으나, 60년대 후반부터는 **아동 대상의 ‘대안 초등학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야학의 특징
- 장소: 교회 지하실, 천막, 철거민센터 등
- 교사: 대학생, 종교인, 은퇴 교사
- 시간: 주로 오후 6시~10시
- 수업 내용: 초등 과정(한글, 셈하기), 위생 교육, 노동법 기초 등
특히 1971년 이후, 일부 야학은 **‘주민 조직’과 결합한 정치적 공간**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3. 실제 야학의 사례들
| 지역 | 야학명 | 운영 주체 | 특징 |
|---|---|---|---|
| 서울 구로구 가리봉 | 가리봉야학 | 대학생 봉사단체 | 철거민 자녀 중심, 산동네 수업 |
| 부산 동구 초량동 | 초량야학교 | 기독교 단체 | 부두노동자 자녀 대상, 식사 제공 |
| 광주 광천동 | 광천야학 | 청년교회 | 문해 + 시민권 교육, 5·18 이후 폐쇄 |
| 대전 원동 | 원동공부방 | 여성노동자 모임 | 야학과 보육 병행 |
4. 정부의 반응 – 묵인과 단속 사이
야학은 공식 교육기관이 아니었기에 **법적으로는 ‘무허가 교육시설’**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취학률을 높여야 했던 정부는 **일정 부분 묵인하거나, 때로는 ‘단속’하기도 했다.**
- 묵인 사례: 종교기관 내 야학에 한해 조사 생략
- 단속 사례: 1975년 서울 신림동 ‘산동네 야학’ 경찰 진입 후 폐쇄
- 정책 편입 시도: 1979년 일부 야학 → ‘보완 교육 교실’로 흡수 시도
결국 야학은 정부 교육정책의 ‘공백을 채운 존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감시의 대상**이기도 했다.
5. 배움의 기록 – 빈민 아동이 남긴 노트 한 장
당시 야학에서 가르쳤던 교재는 대부분 **손글씨 유인물**이었고, 학생들의 노트도 **광고지 뒷면, 종이상자 일부, 기부받은 노트 조각** 등이었다. 한 서울 구로야학 출신 아동의 노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 형이 나에게 한글을 가르쳐 줬다. 이제 나는 내 이름을 쓸 수 있다. 이름을 쓰면 어른들이 나를 다르게 본다.” – 1972년, ‘가리봉야학’ 초등반 노트 중
이는 단순한 문해가 아닌, **존엄의 회복이자 정체성의 시작**이었다.
결론: 야학은 가난한 아이들의 학교였고, 생존이었다
대한민국은 ‘교육을 통해 성장한 나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 성장 뒤에는 **기록되지 않은 교육, 보이지 않는 배움**이 존재했다. 야학은 단순한 밤의 수업이 아니라, **가난 속에서도 배우고자 한 의지의 공간**이자, 그 아이들이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치열한 생존기**였다. 이 글은 그들을 위해 쓰는 작은 역사 복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