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는 유교와 불교, 토착 문화가 뒤섞인 사회였고, 그 속에서 여성은 상대적으로 높은 재산권과 사회적 활동 범위를 누렸다. 하지만 고려 후기로 갈수록 **혼인과 가족 제도는 급격히 남성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혼하거나 버림받은 여성들**은 **사회적 사각지대**에 놓이게 된다. 이 글은 고려 말 수도 개경(開京)에서 형성된 **이혼 여성 중심의 빈민 공동체**를 기록 사료를 바탕으로 복원하고, **중세 조선 이전 ‘비공식 여성 사회’**의 가능성을 추적한다.
1. 고려시대의 이혼, 가능했는가?
고려시대에는 조선보다 훨씬 **개방적인 이혼 제도**가 존재했다. 남녀 모두 **일방적 이혼 요구가 가능**했고, 다음과 같은 사유가 자주 등장했다:
- 재산 문제
- 자식 없음
- 폭력, 유기
- 가문 간 갈등
실제 <고려사>에는 “서울 장안의 이혼 부녀자들이 거리마다 넘쳐났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는 단순한 ‘이혼 허용’이 아닌, **이혼 이후 사회 구조의 결핍**을 보여준다.
2. 여성 빈민 공동체의 형성 배경
| 요소 | 설명 |
|---|---|
| 사회 혼란 | 몽골 침입, 무신정권 붕괴기, 지방 실정 |
| 재혼 제한 | 이혼 여성을 꺼리는 풍조 확대 |
| 경제적 독립 없음 | 남성 중심의 호적·토지 제도 |
| 불교와 토속 신앙 결합 | ‘청정’ 여성 공동체에 대한 관념 수용 |
결국 이혼·과부·유기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식사, 노동, 의복을 공동으로 해결하는 생존 단위**를 만들게 된 것이다.
3. ‘사모합(四母合)’ 공동체 – 실제 사례
개경 외곽에서 발견된 “사모합(四母合)”은 이혼 여성 네 명이 모여 살던 공동 거주지로, <문헌비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청교(淸郊)에 거주하던 네 여인, 모두 남편과 이혼하고 따로이 모여 자급자족하며 사니, 사람들이 이를 ‘사모합’이라 하더라.” – 『문헌비고』, 잡기편
이들은 농작물 재배, 의복 수선, 부녀자 대상 점복 활동 등을 통해 **생계를 꾸려갔으며**, 남성의 보호 없이도 ‘자신들만의 사회’를 유지한 보기 드문 사례였다.
4. 이 공동체에 대한 당시 사회의 시선
- 보수층 시선: 가문 질서를 해치는 방탕한 존재로 비난
- 불교계 시선: ‘속세를 떠난 여성 수행 공동체’로 호의
- 서민층 시선: 점복·약초 등 실질 도움 주는 존재로 수용
이처럼 ‘사모합’과 같은 여성 공동체는 당시 **계급별, 사상별로 매우 상반된 평가**를 받았으며, 공식 사료에서는 점차 소거되거나 왜곡된 기록으로 남게 된다.
5. 조선시대에는 왜 사라졌는가?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유산이 일부 남아 있었지만, 세종~성종 이후 성리학 이념이 강화되며 **여성의 단독 거주, 재혼, 자립 자체가 사회 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여성 공동체’는 **풍속 문란, 불법 점복, 미신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철저히 단속되었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여성 빈민 공동체는 **조선의 법과 윤리 속에서 철저히 소멸되었고**, 그 흔적만이 몇몇 고문헌의 ‘이상한 여성들’로 남게 되었다.
결론: 중세 고려에는 ‘여성만의 사회’도 존재했다
우리는 흔히 중세 사회를 남성 중심으로 이해하지만, **고려 후기에는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간 여성 공동체의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했다. 그들은 사회 제도 밖에서 살았지만, 그만큼 더 자율적이었다. ‘사모합’과 같은 존재들은 **가족 제도 바깥에서도 인간다운 삶이 가능함을 보여준 역사적 증거**다. 이 글은 그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이후, 그 **살아남은 흔적**을 통해 다시 그려본 **중세 여성의 대안 사회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