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직후 서울의 치안 공백과 자경단의 등장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일제의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식민 통치의 붕괴는 **행정, 경찰, 사법 체계의 완전한 공백**을 초래했다. 특히 **일본 경찰과 군인들이 철수하거나 무력화되면서**, 서울은 불과 며칠 만에 **치안 붕괴, 절도·방화·폭행이 난무하는 무정부 상태**로 빠졌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자경단(自警團)**이었다. 이 글은 **1945년 8월~9월 사이 서울 자경단의 조직, 활동, 의미**를 추적한다.

1. 자경단이란 무엇인가?

‘자경단’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를 지키는 단체’**를 뜻한다. 1945년 당시에는 정부도 없고, 미군정도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의 통치 잔재와 혼란을 막기 위해 **일부 주민과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치안 기구**였다.

  • 공식 설립 시기: 1945년 8월 16일~20일 사이
  • 조직 주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종로·중구 주민 협의체
  • 역할: 치안 유지, 도난 방지, 상점 보호, 불량배 진압
  • 무장 여부: 일부는 일본군 잔여 무기·몽둥이 등 사용

초기에는 자발적으로 출발했으나, 곧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산하 조직으로 체계화되었다.

2. 왜 서울은 무정부 상태가 되었는가?

날짜 주요 사건 영향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 행정 기능 마비
8월 16일 경찰서 및 군 부대 무기 보관소 무주인 상태 총기 탈취, 혼란 가중
8월 17일 일본 경찰 대거 철수 치안 공백 발생
8월 18~20일 도심 약탈, 강도, 방화 속출 상인, 지식인 중심 자경단 등장

특히 종로, 충무로, 동대문 일대는 **약탈과 방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에 따라 이 지역을 중심으로 **최초의 자경단이 조직**되었다.

3. 실제 자경단의 활동 방식

자경단은 지역 기반으로 소규모로 조직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활동했다:

  • 야간 순찰 – 상점, 시장, 창고 등 주요 시설 지킴
  • 출입 통제 – 외지인의 진입 제한
  • 도난범 검거 – 상인 폭력단체 및 청년 연합과 협력
  • 건준과의 협력 – 일부는 행정 보조 기능 수행

특히 종로서 자경단은 100명 규모로 조직되어 일시적으로 ‘자치 경찰’처럼 기능했으며, **일제 경찰이 퇴출된 자리에 한시적으로 치안을 맡았다.**

4. 미군정이 자경단을 해산시킨 이유

9월 8일, 미군정이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에 진주한 이후, 자경단 조직은 **공식 치안 조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해산**된다.

미군정의 판단

  • 무장 민병조직 → 치안 질서 위협 요소로 간주
  • 좌파 성향 의심 → 건준과의 연계 경계
  • 공식 경찰조직 부활 계획과 충돌

결국 자경단은 9월 말까지 대부분 해산되며, **일제 경찰 출신 인사들이 다시 경찰 조직에 복귀**하게 된다. 이는 훗날 **경찰 조직의 친일 잔재 논란**으로 이어지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5. 자경단에 대한 평가 – 자치와 저항 사이

자경단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한편으로는 무질서 속에서 **주민 스스로 질서를 세우려 했던 자치의 표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공식 무장 조직으로 통제 불가능한 요소**였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긍정적 시각

  • 주민 중심의 치안 자율성 시도
  • 자생적 민주주의 질서 구축 사례
  • 일제 통치 공백기에 나타난 주권 회복 운동

부정적 시각

  • 무장 및 폭력 사태 발생 사례 존재
  • 정파적 성향 개입 (좌우 대립)
  • 법적 근거 없는 조직 → 미군정 체계와 충돌

결론: 해방은 혼란이었고, 자경단은 자치였다

1945년 8월, 해방은 선포되었지만 **국가는 아직 없었다.** 그 사이를 메운 것은 정치가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 행동**이었다. 자경단은 역사적으로 오래 남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지켜낸 '비공식 국가'였다.** 이 글은 그 잊힌 시민 자치의 기록을 복원하고,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의 조건’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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