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없던 시대, 무인은 무엇으로 출세했을까? 조선 후기, 특히 18~19세기에는 실질적 외침 없이 군역은 형식화되고, 전투는 기록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이 시기 조정은 관료제 운영과 군제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군공(軍功)’이라는 허상의 제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실제로는 돈을 내고 전공을 ‘구입’하는 구조로 변질되어 무신 계급 전체의 권위가 흔들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글은 조선 후기 군공 매매의 실태를 추적하고, 그 제도가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고문서와 실록을 바탕으로 분석한다.
1. ‘군공’이란 무엇이었나?
군공(軍功)은 말 그대로 ‘군사적 공로’를 의미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당시에는 실제 전투 참여자에게 관직, 토지, 품계가 주어졌다. 그러나 평화기가 지속되며, 군공은 실제 공로가 아닌 ‘기록과 추천’으로 산출되는 관행으로 변모한다.
- 정조 이후: 군공 누계에 따라 품계 부여
- 헌종 이후: 군공 기록만으로 ‘무과 병과’ 수준의 대우
2. 군공은 어떻게 매매되었는가?
| 형태 | 내용 | 실제 사례 |
|---|---|---|
| 돈 공납 | 국가에 군자금 헌납 → 군공 기록 부여 | 순조 12년, 경기도 유생 12인 각 100냥 헌납 후 군공 취득 |
| 서류 위조 | 타인의 전공 기록 차용 → 본인 군공으로 위조 | 헌종 3년, 평안도 무관 박씨 적발 |
| 지휘관 청탁 | 지역 수령·만호 등에게 청탁해 공로 보고서에 이름 삽입 | 철종 5년, 강원도 병영 보고서 조작 사건 |
| ‘허전(虛戰)’ 보고 | 실제 전투 없음에도 모의훈련을 ‘전투’로 보고 | 흥선대원군 시기 민병 훈련 기록 중 27% 허전으로 확인 |
이러한 방식은 결국 ‘군공은 돈으로 사는 것’이라는 사회 인식으로 굳어지게 된다.
3. 왜 군공을 사려 했는가?
조선 후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군공 매매가 활성화된다:
- 무관직 진출 우대: 실제 전투보다 기록 우선
- 품계 상승 및 녹봉 혜택
- 문벌 가문과의 혼인 자격 강화
- 신분 상승 경로로 활용 (서얼·중인 포함)
특히 **양반 신분이지만 빈한한 지방 무관 가문**은 ‘돈으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전략’으로 군공 매매에 집중했다.
4. 군공 매매의 결과 – 제도의 붕괴
- 무관 품계와 실제 역량의 괴리 심화
- 훈련도감, 어영청 등 군영의 전투력 약화
- 군역 기피 확산 – “기록만 잘하면 된다”는 인식
- 관청 내부의 매관매직과 결탁
예컨대 1860년대 서울 군영 조사에서 등록된 장교 340명 중 210명이 실제 전투 경험이 전무했던 사례가 남아 있다.
5. 개혁 시도와 실패
흥선대원군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으나 실패한다:
- 군공 발급 기준 강화
- 군공 매입 기록 소급 조사
- ‘진짜 군사력’ 복원 위한 별기군 창설
하지만 근본적인 사회 구조와 인사 시스템이 바뀌지 않아 군공은 여전히 ‘기록의 권력’으로 남게 된다.
결론: 싸우지 않고도 영웅이 되는 법 – 기록이 권력이 된 조선 후기
군공 매매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조선 사회 전반이 ‘형식’을 중시하던 제도의 연장선이었다. 전투 없는 시대, 군인은 무기가 아니라 문서를 들었고, 군대는 병사가 아니라 공적서와 청탁의 시스템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