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국가는 무너졌고 불교는 타락했다는 비판이 거셌다. 조선 건국 세력은 그 명분으로 **성리학적 이상과 유교적 질서의 복원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이상 뒤에는 **사찰의 토지와 인력을 장악하기 위한 체계적인 몰수 작전**, 즉 **불교의 ‘경제력 해체’라는 현실적인 권력 이전 과정**이 있었다. 이 글은 조선 초기에 이루어진 사찰 재산 몰수의 실제 기록을 추적하고, 종교가 권력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한다.
1. 고려 말 사찰의 경제력은 얼마나 강했는가?
고려는 국교로 불교를 인정하고, 왕실과 귀족이 **대규모 토지와 노비를 사찰에 기증**해왔다. 그 결과, 14세기 말 고려 후기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수치가 추정된다:
| 항목 | 규모 (추정) | 출처 |
|---|---|---|
| 사찰 소유 토지 | 전 국토의 10~15% | 『고려사』 토지조 조항 |
| 사찰 소속 노비 | 20만 명 이상 | 『세종실록지리지』 |
| 왕실 사찰 | 200개 이상 | 『신증동국여지승람』 |
사찰은 단순한 종교기관이 아니라, 경제 단위이자 지방 권력의 핵심이었다.
2. 조선 건국 후 사찰 몰수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 1392년 – 조선 건국, 유교국가 선언
- 1394년 – 불교 사원 정리 조례 시행 → 전국 사찰 현황 조사
- 1398년 – 사사전(寺社田) 몰수령 공포
- 1406년 – 88개 사찰 이외 모든 사찰의 토지 몰수
사사전 몰수령은 조선 초 **경제 기반을 유교 관료 체제로 이양하기 위한 핵심 정책**이었다. 이때 등장한 문서들이 바로 사사토문서(寺社土文書), 즉 사찰의 토지 소유권 박탈 명령서다.
3. 몰수 방식은 폭력적이었나, 제도적이었나?
공식적 명분은 '정비'였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강제적 절차**가 시행되었다:
- 지방 수령 파견 → 사찰 토지 조사
- 전답 측량 → 국가 수조권 귀속
- 노비 등록 조사 → 관노 전환
- 저항 사찰 → 무력으로 폐사 조치
예를 들어 지리산 영원사는 수백 명의 농노를 두고 대규모 저항을 시도했으나, 1409년 군사를 동원한 관군에 의해 **강제 폐쇄 및 재산 몰수**되었다.
4. 몰수 이후 사찰은 어떻게 되었는가?
몰수된 사찰의 토지와 인력은 대부분 **유학자 중심의 향교·서원 운영 재원으로 재편**되었다.
- 토지: 관노가 관리하는 ‘학교 전답’으로 전환
- 건물: 관청 창고·역원·향교로 개조
- 승려: 도첩제 실시 후, 일정 수 이상 출가 금지
대표적 사례로 **서울 인왕산 일대의 흥천사**는 한때 왕실 사찰이었으나, 몰수 후 **종친부 관청으로 용도 변경**되었다.
5. 몰수에 대한 반발과 그 결과
불교계의 반발은 있었지만, 조직화되진 못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기록에 남아 있다:
- 1424년 – 경상도 밀양 승려 200여 명 무장 저항 → 토벌
- 1431년 – 함경도 사찰들, 토지 재등록 시도 → 실패
- 세종 시기 – 일부 고승 탄원서 제출 → 단 5개 사찰 토지만 회복 허가
이 과정은 곧 **유교가 종교로서 우위에 선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결론: 사찰 몰수는 종교개혁이 아니라 권력재편이었다
조선 초 사찰 재산 몰수는 단순히 유교의 도래, 불교의 쇠퇴로 보기에 부족하다. 그 이면에는 **국가가 종교의 경제력을 해체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관료 체제로 재배치한 권력 재편의 메커니즘**이 존재했다. 불교는 교리로 패배한 것이 아니라, **토지와 세력, 인력에서 밀려난 것**이다. 이 글은 조선이라는 새로운 체제가 어떻게 이전 질서를 해체하고 자신을 정당화했는지를 **종교와 경제의 교차점에서 재구성하는 시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