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는 신분 사회였지만, **노비 제도가 유연하고 복잡하게 운영된 시대**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노비가 일정한 금액이나 물품을 바치고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속량(贖良)’ 제도**다. 이는 조선과 비교해도 드물게 보이는, **중세 사회에서의 부분적 신분 상승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글은 고려시대에 실제로 작성된 **속량문서의 구조와 의미, 사회적 배경**을 분석하여 **노비 해방의 제도화된 실체**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1. 속량이란 무엇인가?
‘속량(贖良)’이란 문자 그대로 **속죄하거나 속방하여 양민이 된다는 뜻**이다. 고려시대에는 노비가 **돈, 곡물, 포(布), 노동력 등으로 ‘자기 몸값’을 지불하면, 주인이 이를 수락하고 해방시켜주는 계약 행위**가 존재했다. 이는 **법제화된 것은 아니지만 관습적으로 널리 행해졌고**, 실제 문서로 남은 사례들이 다수 존재한다.
2. 속량문서의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었나?
| 항목 | 내용 예시 |
|---|---|
| 서문 | “이 사람 아무개가 신분을 속량코자 하여…” |
| 신분과 이름 | 노비의 본명, 호적 정보, 거주지 등 |
| 속량 사유 | “스스로 성실히 일하여 금 3냥을 마련하였다” |
| 속량 대가 | 쌀 100석, 포 50필, 금전 3냥 등 |
| 증인 | 해당 고을 관리, 문서 작성 서리 |
| 날짜 및 인장 | ○○왕 ○○년 ○월 ○일, 주인의 인장 |
속량문서는 보통 **2통 이상 작성되어**, 하나는 속량된 자가, 하나는 주인이, 또 하나는 **지방 관청**이 보관하는 경우도 있었다.
3. 속량의 유형 – 전면과 부분
속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 전속량(全贖良): 본인과 자녀, 향후 후손까지 신분 상승
- 단속량(單贖良): 본인만 양민 신분, 자녀는 여전히 노비
전속량은 높은 금액이 필요했기 때문에 드물었고, 대부분은 **단속량 형태**로 신분 상승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고려 후기에 특히 활발하게 나타난다.
4. 실제 사례 – 문서 속 사람들
다음은 『고려사절요』와 지방 사찰 고문서에 전하는 속량문서의 실제 기록 일부다.
- 충숙왕 5년(1318) – 개경의 노비 ‘백금’이 포 70필을 주고 전속량 문서 작성
- 공민왕 10년(1361) – 홍건적 난 이후, 함경도 관리가 노비들에게 자속량 허용
- 해인사 보관 문서 – 사노비 ‘순지’가 노동으로 얻은 쌀 100석으로 몸값 지불
이러한 기록은 고려가 단순히 노비를 억압한 사회가 아니라, **경제력과 성실을 통한 부분적 신분 상승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5. 속량문서의 법적 효력과 한계
- 법적 인정 여부: 공적으로 인정된 문서는 지방관청에서 효력 인정
- 한계: 중앙 관청 미보고 시, 타 지역에서 ‘노비 신분’으로 다시 잡히기도 함
- 여성의 경우: 속량 후에도 ‘첩’으로 간주되어 재결혼이 어려움
속량은 **법제의 틈새에서 작동한 계약 제도**였고, 주인의 의지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강제권 없이 이루어진 ‘선택적 해방’**이었다.
결론: 고려는 단단한 신분제 속에서도 작은 해방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중세를 보통 ‘신분의 벽’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고려는 그 벽에 **틈을 내고, 그 틈에서 인간적 희망이 피어날 수 있었던 시대**이기도 하다. 속량문서는 단순한 행정 문서가 아니라, 노비들이 **자기 삶을 되찾기 위해 싸웠던 계약의 흔적**이었다. 이 글은 그 종이 한 장 뒤에 있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불러오는 작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