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공무원 시험 낙방생의 삶이 있었을까?

 


현대 사회에서는 '공무원 시험 낙방생'이라는 단어가 익숙하다. 안정된 직장을 얻기 위한 경쟁 속에서 수년 동안 시험에 도전하고 실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런데 이런 풍경이 조선시대에도 존재했을까? 유교적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서 가장 확실한 출세 수단은 '과거 시험'이었다. 그러나 합격자는 소수에 불과했고, 매년 수많은 낙방생이 생겨났다. 이 글은 조선시대 과거 시험 낙방자들의 삶을 추적하며, 그들이 사회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생존했는지, 어떤 좌절과 대안을 마주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기존 역사 콘텐츠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은 이 주제는 한국사 속 '보통 사람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 조선 과거제도의 구조와 합격률

조선시대의 관리는 대부분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다. 시험은 생원시, 진사시(소과)를 거쳐 문과(대과)로 이어지며, 이 중 문과 급제자는 왕의 인정을 받아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경쟁률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 중기에는 매회 문과 응시자가 1,000명을 넘었지만, 실제 급제자는 30명 내외였다. 결과적으로 매 시험마다 수백, 수천 명의 낙방생이 양산되었다.

2. 낙방 이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낙방생들의 삶은 다양했다. 대부분은 고향으로 내려가 **사설 교육기관인 서당이나 서원에서 훈장**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일부는 향리, 즉 지방 행정 실무직으로 진출하기도 했고, 또 다른 일부는 **가족의 농사나 상업 활동을 돕는 이인자 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명문가 출신이 낙방했을 경우, 가문의 기대와 사회적 체면 속에서 심리적 압박이 컸으며, 이로 인해 은둔하거나 자살을 선택한 사례도 있었다.

3. '선비 실직자'의 문화와 심리

과거 시험 낙방자들은 조선 사회에서 공식적인 지위가 없는 ‘무직 선비’였다. 이들은 학문적으로는 인정받았지만, 사회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들을 풍자한 소설도 등장했다. 예를 들어 홍길동전이나 박씨전 속의 인물들은 출세길이 막힌 현실을 반영하며, 좌절한 젊은 지식인의 표상이 되었다. 또한 낙방생들 사이에서는 '다음 시험까지 공부만 하자'는 식의 대기 문화가 형성되었고, 이는 오늘날의 '공시생 문화'와도 유사한 구조를 보였다.

4. 낙방생들의 대안적 진로

과거 시험에 실패한 후, 다음과 같은 대안 경로로 진출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 한의학 공부 후 의원 활동 – 인문학적 지식이 있는 선비들이 의료인으로 전직
  • 작가, 시인으로 활동 – 실패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사례 (예: 김삿갓)
  • 개종 후 불교·도교 등 종교적 삶 – 출세 대신 깨달음을 추구
  • 정치적 저항 세력으로 변신 – 반체제적인 행동으로 사회에 반발

5. 조선 과거 낙방생의 삶 비교 표

유형 주요 활동 대표 인물 현대 유사 직업
훈장형 서당, 서원에서 학생 교육 미상 (지방 기록 多) 학원 강사
문학형 시, 소설 등 문예 활동 김삿갓 자유 작가
실무형 향리, 서리 등 지방행정 보조 미상 공공기관 계약직
탈속형 종교적 은둔, 방랑 생활 초의선사 등 종교인, 은둔자

결론: 조선의 낙방생들도 오늘날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 낙방생들은 오늘날의 공시 낙방생들과 매우 유사한 삶을 살았다. 치열한 경쟁, 반복되는 실패,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각자 나름의 대안을 찾아야 했고, 그 과정은 결코 단순하거나 낭만적이지 않았다. 역사는 ‘성공한 사람’만 기록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한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이 글은 그러한 시선으로 조선사회를 재해석하고, 현대 사회의 문제를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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